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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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법회] 6월 9일 법문
총무스님 2019-06-09
부처님 마음에는 때가 없습니다.우린 늘 마음을 닦아 누굴 제접 해도 밝고 환한 마음을 나눌 수 있도록 정진해야 합니다.마음을 어떻게 닦느냐?저의 은사스님이신 眞字 觀字 회주스님께서 제게 유언 하시길 “얘야, 있는 척, 아는 척, 잘난 척 아무 소용이 없다.복을 지어라. 복을 지으면 네가 살기가 좋고, 네가 지은 복으로 많은 사람이 편하게 살 수 있다.그리고 마음을 닦아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마음을 닦아라, 복을 지어라.’라는 말이 바로 “이거구나!”라고 와 닿지 않았습니다.은사스님의 법향이 그리울 때면 스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복을 짓고 마음을 닦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발우공양 때도 ‘마음을 닦는 게 바로 이거로구나.’ 라고 생각 했습니다. ‘이 음식에 깃든 은혜 두 손 모아 합장하고, 상구보리 하화중생 명심 발원하옵니다.옴 마니 반메 훔, 옴 마니 반메 훔, 옴 마니 반메 훔.’ 기도를 드린 뒤 공양을 합니다. 그리고 발우를 씻어서 나갈 때는, ‘이 음식의 공양을 받고 뭇 중생들이 모두 다 지혜를 증득하십시오.’라고축원 하는 이 시간이 마음이 닦기고 있구나 하면서 환희심이 났습니다.염불을 하고, 또 기도를 할 때는 내 마음이 정말 편안하고 행복하니 이것이 불심이며 그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고. 또 다라니를 하고, 참선을 하고, 아미타불을 부르고, 관세음보살을 부를 때, 내 마음은 절로 닦여서 부처님이 되어 있었습니다. 불자 여러분들도 시간 나는 대로, ‘노는 입에 염불하십시오.’ 그럼 관세음보살처럼 지혜롭고, 자비롭게 살 수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내 마음에 안주하고 계시는데, 내가 계발을 못 했을 뿐입니다. 자신의 관세음보살을 마음에 넣어놓고, 그 관세음보살님의 버튼을 누르질 않은 거죠.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하면서, 자신의 관세음보살님을 나투어 낼 때 10초면 10초 관세음보살 되고, 1시간 지성으로 관세음보살을 염하면 1시간 관세음보살이 되는 겁니다. 관세음보살은 어떤 분이냐 하면. 지혜롭고 자비로운 어머니 마음으로 發苦與樂 하시는 부처님 이십니다. 지혜는 자비를 먹고 살지요. 그럼 지혜란 내가 선택한 것이 후회가 따르지 않고, 나도 이롭고, 남도 이롭고, 그 조직도 살아나고, 이런 행위의 결정이 지혜입니다. 각자 사용한 시간과 행위가 후회가 따르지 않고, 상생이 되고 매사 창출이 되고 주변과 함께 모두 신바람으로 행복을 나누고, 그렇게 사는 것이 우리불자님들의 지혜로운 삶이라 여깁니다. 그런 지혜는 늘 자비를 먹고 삽니다. 그러니 자비가 꼭 있어야 되겠죠? 그럼 자비란 무엇인가. 나눔이며 관계입니다. 우리는 관계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요? 스스로 살펴보십시오. 잘난 척하고, 있는 척하고, 아는 척하고, 또 아니면 움츠리고, 원망하고, 미워하고, 불편한 관계를 대하고 있지는 않는지를 ,, 우린 이제 마음의 정원 진관사에서 모든 분들께 감사해 하고, 고마워하고, 상대에 맞는 좋은 말을 해줄 수 있는 지혜와 자비를 배우고 실천 하는 곳이 되기를 염원합니다. 내 스스로에게도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하고, ‘오늘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다행입니다. 제가 이 귀중한 인생을 얻었으니, 오늘은 화를 내지 않고 어려운 일도 인내 하겠습니다. 좋은 말을 쓰고 착한 일을 하겠습니다. 오늘도 마음 닦는 수행을 하면서 제 모든 것을 이 세상에 베풀겠습니다. 이 귀한 오늘 그렇게 살겠습니다.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이 마음을 발원하는 겁니다. 아침에도 점심에도 발원하는 것이 발심입니다. 우리불자는 늘 자신을 관찰하고 발심해야합니다. 시시때때로 숙업으로 익힌 습관이 여름에 여기저기 잡초가 금방 자라는 것처럼 마음에 잡초가 순식간에 자라게 되면 불행하고 우울해지고 곧 중생 노름에 빠지고 고통의 시간을 보내게 되는 겁니다. 많은 생 동안 그런 생활을 익혔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부처님 마음을 이탈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 불자님들이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습관을 익히시어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라고 금방 불심으로 모셔다 놓을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살다보면 돌아서면 주변 경계가 또 중생심으로 변하게 합니다. 남편이 또는 아이가 바른 행동을 안 했을 때, 화가 불끈 일어나죠. 그 경계에서 내 생각을 갖다 쓰게 되는 겁니다. 내가 생각하는 생각, 자기가 경험한 것이 몸에 저장이 되어 업식이 동하여 자기 잣대로 추렴해서 번뇌를 일으키는 게 중생입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얼마 전 제가 미국을 처음 가봤습니다. 여행일정 중 라스베이거스를 가게 되었는데, 가기 전부터 불편한 마음 이었습니다. 장소도 청정하지 못 하고 그곳에서 일정 중에 공연이 있었습니다. 같이 동행 한 분들께 ‘저는 참가하지 않고 호텔에만 있겠습니다.’라고 하니 동행 하신 분들이 저를 설득을 했습니다. “제가 아무렴 스님을 이상한 곳에 모시고 가겠습니까.” “저를 설득하려고 하지 마세요, 몸은 기억합니다. 제가 본 것은 제 아리아식에 담겨지고, 몸이 기억하기 때문에 저는 안 가겠습니다.” 그러나 계속 설득을 해서 결국 설득을 당했습니다. 저는 라스베이거스하면 파친코와 도박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공연 또한 이상하다 생각한 겁니다. ‘도박꾼들만 오는 곳이다.’라고 생각 했는데 제가 생각하는 건 너무나 어리석은 마음이었습니다. 실제의 공연은 너무 훌륭한 예술이었습니다. 감탄과 탄성으로 대방광불화엄경의 세계를 경험하였습니다. 저의 작고 어리석은 마음으로는 그런 훌륭한 공연을 보지 못 했을 것인데 다행히 복 많고 훌륭한 분들 덕분에 좋은 경험을 하고 돌아 왔습니다.여러 불자님들이 모두 부처님 마음 실천하고 행할 때 가는 곳마다 선연이 되고 또 안목이 넓혀지고 도량이 커집니다. 우린 수많은 중생들 중, 벌레, 애벌레, 소, 말, 기생충 등등 중에 우리는 사람 되었습니다. 사람이 되고도 불법을 만났고 또 복이 많아 진관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부지런히 마음을 닦고, 공덕을 짓고 했을 때 우리는 명복을 받게 되고 어떤 환경에서도 환희롭게 자비를 나눌 수 있습니다.우리가 세상에 태어날 때 주먹을 딱 쥐고 태어났습니다. 갈 때는 손을 펴고 다 주고 가죠. 아무것도 가져가는 게 없습니다. 누구를 데리고 가나요?아무도 없이 혼자 자신의 마음의 성적표만 가져갑니다. 어제 천수 다라니기도를 마치고 지난주에 봉사 부단장으로 위촉 받은 보살님과 차담 하면서 말씀하시길, ‘스님께서 봉사부단장으로 임명 해 주셨는데, 논을 사고 밭을 산 것도 아닌데 너무 기분이 좋았다고 하셨습니다.’그 말씀에 저는 마음에서 환희로움과 보람을 느끼고 같이 동석한 보살님은 천상분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듯하다 하였습니다.그 보살님께서는 대웅전 천일을 동참하시며 쭉 정진 하시다 회향 때 십만 배 기도정진을 통해 자신을 내려놓게 되며 다른 운동을 안 하셔도몸도 마음도 너무 가볍고 늘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진관사에서 매번 불기 닦고, 다른 봉사를 할 때 빵과 음료수를 가지고 오시는데 봉사자 인원이 점점 많아지고 신도님들이 서로 일을 더 하고자 하는 마음이 너무 아름답고 보기 좋으며 이곳이 극락세계라 말씀 하셔 제가 생전안락 사후왕생의 가피가 분명하다고 했습니다. 마음의 정원 진관사 사부대중 모두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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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2019년 4월 3일 법문
해주스님 2019-04-03
반갑습니다. 주지스님으로부터 너무 과찬의 말씀을 들어서 황송합니다. 말씀해주신 것처럼, 우리 주지스님이 운문사 사교반에 계실 때 제가 청도 운문사로 출가를 하러 갔어요. 그때 주지로 계시는 태자구자스님의 손상좌가 되어가지고, 운문사 사리암에서 행자생활을 하고, 다시 본사 노스님이 계신 부산으로 와서 -저는 부산에서 운문사로 좀 멀리 간다고 갔는데, “부산서 왔으면 부산사람이 책임지소.”해가지고 우리 노스님 절로, 부산으로 다시 와가지고- , 계 받고, 운문사에서 다시 처음부터 공부할 때, 주지스님께서 화엄반이셨어요. 그래서 그 때의 아주 귀중한 인연으로 이렇게 훌륭한 진관사 대도량에서 이 좋은 법회에 함께 하게 되어 주지스님께 먼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또 총무스님은 동래에서 인연이 되가지고요, 그 인연으로 불자님들과 시간을 갖게 된 거 같아요. 지금 영단에 영정으로 계신 진관큰스님께서 증명을 해주고 계시는 이 자리에서, 주지스님 모시고요, 40분 동안 화엄경 -제 전공이 화엄경입니다-, 화엄경 말씀에 입각해서 ‘부처님과 나’ -나는 나만의 내가 아니고 우리 모두와 다르지 않습니다. 화엄세계는 법계라고 하는데요.- <화엄법계에 부처님과 나에 대해서 새겨보고, 그런 입장에서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어떻게 신행생활을 해야 하는가.>를 간단히 되새겨보겠습니다. 방금 제가 들어올 때 영단을 향해서 법성게 독송하셨죠. 법성게는 668년에 지어졌는데,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천 몇 백 년 동안 계속 독송되어 내려온 화엄경의 핵심을 모은 게송이에요. 그 당시 통일신라 전후를 사셨던 의상스님이 지으신 <의상조사법성게>인데요, 화엄세계를 그대로 담아내고 있어요. 그래서 화엄경과 의상스님의 법성게의 내용을 통해서 내가 누구인가, 부처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내가 부처님께 항상 기도 올리고, 신행생활을 하는가를 보겠다는 겁니다. 크게 보면 우리와 부처님의 관계가 두 가지라고 생각해요, 더 나누면 세 가지, 구체적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첫째는 <부처님은 부처님이고, 나는 나야. 부처님은 우리 중생하고 너무 다른 분이시다.> 부처님은 어떤 점에서 그렇게 다르신가. 너무 복잡하면 안 들어오니까, 간단히 선명하게 할 필요가 있어서 뽑아보면 첫째, 부처님한테는 번뇌가 하나도 없으시고, 우리 중생들에게는 번뇌망상이 엄청 많잖아요. 부처님에게는 하나도 없는 번뇌망상을 엄청 많이 갖고 계시네요.(웃음) 둘째, 부처님께는 공덕이 무진장 많으세요. 한량없는 공덕을 구족하고 계신데, 우리는 공덕 짓기가 그리 힘드네요. 그래서 부처님께는 하나도 없으신 번뇌는 드글드글하고, 부처님한테는 구족되어있는 공덕은 별로 못 짓고, 이러니까 우리가 미혹번뇌로 맨날 망상부리고, 그래서 고통 받고, 다음 생 또 어디로 갈지 막막하고, 그런 입장의 우리들을 부처님께서 구제해 주시는 분으로 우리가 모셔요. 그래서 어떤 분을 부처님, 석가모니부처님으로 모시느냐하는 것이 칠정례 예불문에 그대로 나와 있죠. 부처님을, 특히 석가모니 부처님을 삼계도사(三界導師)라고 하죠. 삼계가 욕계, 색계, 무색계, 모든 윤회하는 중생들 세계예요. 그래서 삼계의 중생들을 인도해 주시는 분이세요. 도사, 부처님의 세계로 구제해주시는 분이시다. 또 사생자부(四生慈父)라고 하네요. 태란습화 사생은 태어나는 방법을, 생멸하는 존재가 어떻게 태어나느냐 하니까 태란습화(태생胎生, 난생卵生, 습생濕生, 화생化生)로 태어난다는 거죠. 그런 모든 중생들의 인자하신 어버이시고, 자부이시고. 그리고 마지막에 시아본사 석가모니불이라고 해요. 우리들에게는 스승이시고. 지금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을 열심히 배우고 닦아서 공덕을 구족해서 부처님처럼 되겠다, 성불하겠다는 원을 가지고 있어요. 그럼 또 다른 입장은 뭐냐. <본래 부처님과 다르지 않다,> 그거예요. 본래 부처다, 본래 성불이다. 이런 말 많이 들으셨죠. 중생즉불(衆生卽佛)이다. 중생이 곧 부처다. 그게 무슨 말씀인가하면 ‘내가 곧 부처다.’라는 거예요. 고개 많이 끄덕이시네요.(웃음) 내가 곧 부처인데, 부처님 같은 공덕이 안 쌓여지네요. 그래서 본래 나의 모습을 되찾는 것이 신앙생활이고 수행생활이라는 거예요. 본래 나의 모습. 우리가 부처님을 믿고 따르는데, 부처님은 여기 계시고, 내가 생각하는 부처님은 여기 계신데, 그 갭을 점점점 줄이는 게 예불하고 기도하고 수행 생활하는 걸 통해서 한다는 거예요. 또 한편으로는 본래 내가 부처라는데 그렇게 못 살고 있어. 화엄경에서는 부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참 이상하고 이상하다. 중생들에게 나와 똑같은 지혜가 다 있는데, - 부처님은 깨달으신 분, 각자이고, 무엇으로 깨달으셨나 하니까 큰 지혜로 해서, 일체 지자라고 불러요. 뭐든 것을 다 아시는 거.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지혜를 가지신 분. 그래서 일체지지(一切智智) 라고 합니다. 그런 지혜가 중생들에게도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헤매고 다녀요. 왜냐하면 망상, 집착 때문에.’ 화엄경의 유명한 말씀이죠. 중생들이 망상부리고, 헛되게 망상 부린다는 것은 실제가 아니란 소리예요. 실제 있는 건 망상 부린 게 아니지요. 그러니까 환몽(幻夢)과 같은 꿈처럼 꿈속의 일은 실제가 아니에요. 그런데 그것을 실제인 것처럼 내가 매달리니까 아무것도 얻을 수가 얻지, 당연하죠. 꿈의 일을 내가 붙잡을 수 없잖아요. 있어도 금방 사라지고, 금강경의 말씀처럼 여몽환포경(如夢幻泡暻) 여무역여전(如霧亦如電). 그런 존재를 내가 붙잡으려고 애를 쓰는 게 집착이에요. 그러니까 지혜가 있기는 한데 사용을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법신은 법신인데, 번뇌망상 때문에 법신의 공덕이 못 나오고 있는 법신이다, 그래서 그것을 재전법신(在纏法身)이라고 그래요. 달리 말하면 부처님처럼 될 가능성이 있는데 지금은 아니야. 그래서 뭘 가지고 있다고 하냐면 불성을 가진 존재라고 해요. 부처님 성품이죠. 부처님의 지혜, 자비, 원력이 다 한마디로 말하면 일체지지에요. 그런데 가능성으로만 있어요, 우리에게는. 부처님의 성품이 부처님에게 있으면 묘엄이 지금도 펼쳐지는 마음인데, 우리에게 있으면 묶여있다는 거예요, 망상집착에. 그래서 그것을 없애고 본래 나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이 신행생활이고 수행생활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세존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존귀한 분이라고 해요. 깨달으신 분, 붓다고. 진리의 세계에서 오시고 가신다고 해서 여래. 여래10호가 있잖아요. 그런데 그 여래 10호는 공덕이 무진장 있는 이름인데, 우리가 본래불이라고 하면서 감히 여래10호로 못 불리잖아요. 지금 활용, 쓰지를 못하고 있어요. 그런데도 우리는 자부심은 있어요. 불자라고. 불자는 크게 또 두 가지 측면을 얘기할 수 있어요. 하나는 부처님 제자, 부처님은 우리에게 시아본사, 우리의 스승이시고, 그래서 우리는 부처님의 제자인데, 또 한 면은 불자, 부처님의 아들, 딸이다. 지금 우리 보살님들이, 어머니이신 분들이 많으실 텐데, 딸하고 본인하고 같은 몸이에요, 다른 몸이에요? 우리가 부처님의 아들, 딸이면 우리가 부처님과 같은 몸인가, 아닌가? 같은 몸이라고 하신 분은 같다고 볼 거고, 다른 몸이라고 한 분은 다르다고 할 건데, 공평하게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라고 할 수 있겠죠. 왜냐하면 아들, 딸이 부모님의 피와 살을 물려받았잖아요. 전혀 다른 게 아니에요. 그런데 삶이 완전히 다르네요. 특히 출가하신 스님은 진짜 다르네요. 좀 더 오래 출가생활하면 아들, 딸이었지만, 이제는 아니에요. 만나도 별로 신심이 굳지 못하면 얘기 할 것도 없어요. 신심이 굳으면 부처님 얘기하느라고 좋은 시간이 되겠지만. 우리도 부처님 아들, 딸이지만, 부처님 집에 태어났어요. 주소가 같아요. 부처님 집에 우리가 살아요.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다르기도 하다’라고 보면, 부처님을 모실 땐, ‘부처님의 훌륭한 공덕을 제게도 주십시오.’ 하면서 매달리는데, 그게 타력이에요. 그러니까 나는 미혹중생인데, 부처님께서 다 건져주세요. 부처님도 그리 하시려고 오셨다고 했어요. 좀 있으면 부처님 오신 날도 돌아오는데, 삼계개고 아당안지(三界皆苦 我當安之). 삼계가 다 고통의 세상인데, 마땅히 편안하게 하리라고 하셨거든요. 그러면 부처님께서 2,600년 전에 오셔가지고 편안하게 해주셨다 믿어요?(네) 대단하시다.(웃음) 이미 다 제도해 주셨는데, ‘여전히 나는 아니야, 아니야, 안 편안해.’하면 되겠어요? 그러면 안 믿는 거예요. 우리는 이미 부처님에게 제도 받은 몸이라고. 미처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것을 깨닫게 해 주는 게 이미 제도 받아가지고 더 이상 안 편할 게 없는데, 왠지 안 편하네, 공연히. 그걸 공연히 그런다고 그래요. 그런데도 안 편하니까 공연히 또 망상부리고 그럼 또 오시는 거예요. 매일 오시고 순간순간 오시고 찰나 찰나 오시고. 그렇게 해서 제도 받는 입장이라면 하나는 부처님께서 하신 것을 내가 그대로 하겠다고 나가요. 그것을 자력수행이라고 해요. 내 힘으로. 내가 충분히 할 수 있다 그거죠. 내 힘으로 하는데, 우리 부모님들이 아이들을 보면 ʻ크고 나면 제 힘으로 큰 줄 알아.’ 그러죠. 부모님께서 낳아주시고 살펴주신 연이 없으면 그렇게 못 컸는데도, 크고 나면 잊어버려요. 그러면 안 되고. 크면 부모님의 은혜가 새삼스럽게 깊이 와 닿아요, 그렇죠? 그래서 부모님 일을 도와주게 되요. 불자님들이 더 성숙되시면 ‘불보살님 하신 일을 제가 돕겠습니다.’ 이렇게 나온다는 거죠. 그래서 의상스님께서 <백화도량발원문>을 써서 관세음보살이 계시는 백팔도량에 왕생하기를 바랬는데, 그 때는 이미 컸으니까 관세음보살 하신 일을 제가 돕겠습니다, 이리 나오는 거예요. 어느 글에 보니까 지옥에서 지장보살 하는 일이 너무 많아 가지고, 지장보살님이 로펌을 차리고 싶으시다고.(웃음) 그러면 지장보살 따라서 지옥까지 가는 거예요. 우리는 내내 극락왕생만 발원해요, 힘이 없을 때는. 힘이 있을 때는 부처님을 도와 드릴 수 있다, 어디를 가든 상관없다. 그럴 때 자기의 본래 힘 있는 모습이 점점점점 드러나게 된다는 거예요. 그것을 의상스님이 법성게에서 <법성원융>하다고 했어요. 우리 모든 존재들은 법성신이라고 했어요. 천수경에 보면 원아조동법성신(願我早同法性身)이라고 있지요. ‘법성신과 같아지이다.’라고 원을 했어요. 원은 했는데도 어떻게 되는 게 같아지는 거야? 원아조동법성신, 여래십대발원문 했어요. 그런데 법성신이 뭔지 알아야 같아지죠. 대단한 법성신이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으로 시작되는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이 법성신이에요. 달리 말하면 모든 존재의 성품이 원융무이한 것이 법성인데, 그래서 모든 존재의 나를 뺄 수가 없다는 거죠. 모든 존재가 나야. 왜냐하면 나도 공하고 남도 공하고 그러니까 자기가 없다고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바로 법성신이에요. 근데 이 법성신을, 법성게의 마지막 구절이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이에요. 옛부터 부처였다는 거예요. 조사전이나 원각경에서도 본래성불을 얘기하고, 조사선에서도 즉심시불을 얘기하는데, 그 본래가 언제부턴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옛부터 그게 본래불이에요. 그것만 탁 있고, 보기만 하면 부처님이에요. 그렇게 되면 하는 모든 행위가 사실은 내가 깨달아도, 내가 내 모습을 본래 깨달아도 부처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셨고, 조사스님이 일러주신 말씀에서 깨닫잖아요. 그래서 ‘자력과 타력이 둘이 아니다.’라고 이야길 해요. 자타불이. 그러니까 하늘의 해를 바라보는데, 내 눈으로 봐. 내가 열심히 발원을 하고 열심히 원행을 하는데, 불보살님이 가피를 행해서 자타불이라는 본 모습을 바로 보는 거. 이것을 엄청 중요한 수행으로 봤어요. 나의 본모습이라는 소리가 법성신이라고 할 때,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니까 그 마음이 부처님 마음이라는 거죠. 부처님 마음을 뭐라고 그러냐. 불성이라고 그랬죠. 그것들 탁 보면 견성했다고 하는 거예요. 어떤 방법을 통해서? 조사선에서는 화두를 통해서 하고, 화엄에서는 부처님을 바로 보고 부처님이 나와 둘이 아닌 나의 본 모습의 본 성품을 바로 보고, 그게 부처님의 지혜로 보는 거예요. 바로 그렇게 정진하는 것. 탁 보면, 견성하면 성불했다고 해요. 모든 마구니의 항복을 받아 도를 이루고, 번뇌망상, -마구니가 번뇌에요,- 그거를 항복받고, 누르고 제거하고, 번뇌를 없애고, 망상을 없애고, 그리하여 도를 이루면 항마성도라고 하는데, 본래 부처님 마음 탁 보면 견성성불이라고 하네. 엄청 쉽다 그렇죠. 본래 부족한 게 하나도 없어요. 왜 자꾸 하느냐 하니까 아직 그것을 못 보는 중생들에게 부처님처럼, 부처님 일을 도와서 인도해주고 구제해주기 위해서, 그게 불자의 진짜 성숙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근데 그게 잘 안되네요. 깨닫는 거 엄청 쉽다고 그래요. 조사선에 세수하다 코만지는 것보다 쉽다고 그랬어요. 코 빼고 세수하기 어렵잖아요. 열심히 정진하면 7일이면 깨닫는다고 하고. 그런데 우리가 부처님 믿고 이 법당을 다닌 지도 얼마인가요. 그런데도 어쩝니까. 그래서 연이 필요합니다. 인은 나에게 있어요.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이 나에게 있어요. 조금만 도와주면 좋겠는데, 그 도와주는 연이 다양하게 펼쳐있어요. 예를 들어 화엄성중 신중님은 대승경전에 많이 나오세요, 법화경에도 계시고 화엄경 세주묘엄품에 보면 39위 신중 나오고, 우리는 신중단의 104위 신중님을 찾기도 하고, 굉장히 많지요. 그 중에서도 원조격인 신장님이 화엄경에 나오는 신중님이십니다. 정근할 때 화엄성중을 부르죠. 법화성중, 금강성중 다 할 수 있는데, 화엄성중을 해요. 원조격에 해당하는 분이죠. 이 신장님은 오로지 삼보를 옹호하겠다는 원으로 수행을 하셨어요. 그래서 해탈하셨어요. 39분 신중님이 모두 해탈을 하셨네. 39분이 하셨다는 게 아니라, 그분들의 근속들이 얼마나 많아요. 여기는 혼자 오셨지만, 축원 올릴 때 보면 엄청 많아요. 그 근속들이 다 해탈하셨네요. 그래서 세주묘엄품이 굉장히 긴데, 본인이 해탈한 만큼 보이는 부처님 공덕세계에 대한 찬탄이 이어져요. 무진장하게. 내가 화엄성중 하나에 해탈문을 얻었어. 그런데 보현보살같은 분은 무진장 해탈문을 얻거든. 약간의 차이는 있어요. 물은 같은 물이라도 이 컵에 담긴 물은 목이 마른 것을 적셔주지만, 계곡이 흘러가는 물은 내 목만 적셔주는 게 아니에요. 공덕의 양이 달라요. 그래서 대승에서의 수행은 공덕을 계속 쌓아가는 거예요. 그러나 대부분의 불자는 그걸 모르고 업장 때문에 꼼짝을 못해요. 그래서 업장 참회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을 계속 해나가는데, 부처님을 믿고 따르고 부처님 법을 옹호하고 믿고 따르는 자들을 보호하는 게 화엄성중의 할 일이었어요. 그걸로 해탈하셨네요. 해탈하시고 뭐하시나? 계속 삼보를 옹호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법성게 독송하시면 화엄성중을 하시는 거예요, 물론 신장단에 반야심경도 하고, 신장님 예경도 하고 다 하지만. 그래서 화엄성중은 오로지 삼보옹호하는 일로 해탈하시는 거예요. 하시는 일도 그것만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할까? 무진장 할 일이 많아요. 구체적으로는 엄청나게 많은데, 한마디로 바라밀행으로 이야기해요. 육바라밀, 십바라밀이라고 하는데, 그 바라밀행을 무엇으로 하느냐 그거죠. 신구의 삼업으로 해요. 몸으로, 입으로, 생각으로 신구의 삼업으로 해요. 그러니까 몸관리, 언어관리, 정신관리만 잘하면 부처님 일을 도와주면서 행복할 수 있다. 근데 그걸로 하는 일이 무진장 많은데, 바라밀행도 하고 명상도 하고 엄청 많은데, 10가지 –열은 무진수에요, 완전수-로 모아서 십업으로 이야기해요. 천수경보면 십악참회하고 들어가잖아요. 그런데 그건 사참(事懺)이고, 제2의 자성이 없는 것 까지 죄를 뭐가 짓냐 하니까 신구의 삼업으로 짓지만, 몸으로 말로 하는 것도 마음이 함께 해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마음도 공한 줄 알 때 죄가 다 없어지는 이참(理懺) 이에요. 사참, 이참, 우리가 노상 해요. 하는 줄 모르고 있어도 한다고, 절에만 오면 하게 되니까. 또 다르게 표현을 하면, 삼업 말고, 내가 업을 짓든 공덕을 짓든 윤회하는 인연을 짓든 극락왕생하는 공덕을 짓든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는 행위를 하든, 나도 행복하게 하고, 남도 행복하게 하는 공덕행을 하든 무엇으로 하느냐. 그게 신업과, 구업과 의업이라고 했는데, 그건 너무 잘 아는 거니까 또 다른 측면이 있어요. 예를 들어서 여기 계시는 분이 둘로 딱 나눠 본다면, 스님과 재가자로 나눌 수도 있고, 안경 끼신 분과 안 끼신 분으로 나눌 수도 있겠네요. 만약에 안경점에서 누가 왔으면 스님과 재가자가 아니라, 안경 낀 분과 안 낀 분이 더 눈에 띠겠네요. 그런데 거기에 다 포함이 되죠. 그래서 무엇으로 다시 나누냐 하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실 때 일체가 뭐냐. 뭐든 것은 제행이 무상하고, 일체가 다 고고, 무아고 항상 말씀하시니까, 만동자라는 분이 부처님께 여쭸어요. <일체가 뭐냐>고. 제행, 일체, 제법 이렇게, 무상, 고, 무아라고 말씀하시는데, 일체가 뭐냐고 하니까 부처님께서 <오온(색수상행식),12처(육근과 육경)>이랬어요. 육근은 인식기관, 육경은 인식대상. 그래서 반야심경에 보면 이것은 다 공해서 없다고 했어요. 오온, 색수상행식이 다 공하고, 왜 공하냐 하니까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이랬어요. 색성향미촉법이 다 공하고, 우리 눈이 상대하는 대상을 색경 또는 색진이라고 하는데, 만나면 안식이 발생이 되죠. 그것을 안식이라고 마음이라고 해요. 그런데 그것과 합하면 18가지에요. 눈 귀 코 혀 몸 뜻 육근, 빛과 소리와 향기, 맛, 감촉, 법경계 합쳐서 육진, 여섯 경계. 다 부딪치면 마음이 발생하게 되어있어요, 육식, 18개. 그것이 모두 다 공하다는 것을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라고 했네요. 그러니까 다 공해서 없지만 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살아간다는 거죠. 원효스님이 의상스님보다 8살 위세요. 통일신라 전후에, 원효스님이 육근을 참회하는 참회문을 지으셨어요.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지었다고 전해지는 참회문이 원효스님이 지으신 <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예요. 육정은 육근을 얘기해요. 육근, 눈이 색경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거기다 온갖 망상을 일으키니까 정식이라는 것을 붙여서 육정이라고 표현을 했어요. 그래서 육근참회를 하네요. -제가 진관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진관사가 언제 창건이 되었나보니, 일설은 원효스님이 창건하셨다는 설도 있다고 되어있더라고요-. 원효스님이 처음으로 참회를 하는데, 대승참회, 어떻게 참회를 하느냐. 눈으로 참회하고, 귀로 참회하고, 왜냐하면 그걸로 살아가는 거니까. 봄 되면 온통 꽃 보러 가는 건 . 눈이 경계 따라가는 거예요. 귀도 풍문듣기 좋아하면 소리 따라가는 거예요. 원효스님이 왜 육근을 참회하라고 했냐하니까, 대부분의 중생들은 게으르다고. 육근이 게으르다는 소리 잘 안 들어본 소리죠? 육근이 게을러, 방일한 것을 참회한다고 했어요. 게으르다는 말은 경계 따라 온통 쫓아다녀서 깨달음을 등지는 거예요. 그것을 배각합진(背覺合塵)이라고 표현을 해요. 깨달음을 등지고 티끌을 따라간다고. 티끌이 육진경계예요. 그러니까 보는 거 다 쫓아가는 거예요. 광고가 그것을 잘 이용하는 거잖아요. 아무 생각 없었는데, 누가 라면을 후루룩, 요즘 먹방 많이 하잖아요, 나도 하나 끓여먹을까 하잖아요. 견물생심이라고 안 보면 괜찮은데 보면 욕심나는 거 이런 거예요. 안 봤을 때는 다 용서해 줄려고 했는데 딱 보니까 속이 뒤끓고 그런 거. 엄마 딸 사이도 그렇죠. 보면 웃어줘야지 했는데, 딱 보면 색경계를 막 따라 가는 거야. 그러니까 배진합각이 아니고, 티끌을 등지고 깨달음이 와야 하는데. 그런데 육근도 그렇고,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오온뿐만 아니라, 12처도 다 무상하고, 고고, 무아라 하셨거든, 공한 줄 알아라. 대승에서 얘기하면 무자성공(無自性空)이라고 해요. 마음도 공하고, 이참에서도 얘기했듯이. 공한데 공연히 안으로 육근, 밖으로 육식의 경계를 만들어 가지고, 자기가 만든 것을 쫓아가는 거예요. 그것을 원효스님은 환호환탄환사(幻虎還呑幻師)라고 그랬어요. 환으로, 요술로 만들어진 호랑이가 환호예요. 마술사 환사를 도로 잡아 먹는다 그러네요. 만들어 놓고 만들어 놓은 경계에 내가 먹혀들어가는 것. 마술사가 환으로 호랑이를 만들었는데, 오히려 그 호랑이가 마술사를 잡아먹어요. 자기가 만들어 놓고 거기에 자기가 묶이는 일이 엄청 많아요. 공연히 자기가 가치를 매겨놓고 거기에 자기가 묶이는 거 엄청 많이 보지요. 그것을 원효스님이 유명한 말씀 환호환탄환사(幻虎還 呑幻師)라고 하시죠. 원효스님은 그 모든 것은 일심이 만들었는데, 그 일심조차도 공하지만, 없는 건 아니예요. 그래서 금강경에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 시인행사도(是人行邪道)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 라고 했는데, 화엄경에는 색으로 나를 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색으로 나를 볼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삼십이상(三十二相) 팔십종호(八十種好). 소리로 나를 구할 수도 없지만, 소리로 나를 구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라고 해요. 법문 듣고 발심하고. 화엄이 이렇게 무진장하게 포섭을 하네요. 그래서 뭘 하게 했냐하니까, 그러한 일심 청청한 본래 마음으로 돌아가게 하는 거, 바깥 경계에 끄달리지 말라는 얘기죠. 그래서 일심으로 돌아가라. 진관사에서 자비도량참법도 기도하시더라고요. 자비도량참법 마지막, 열 번째에 육근의 원을 세우라고 했어요. 안근의 원을 세우고, 이근의 원을 세우고... 그러면 안근의 원을 세우면 어떤 원을 세우라고 했어요? 눈으로, 예를 들면 참혹한 거 안 보기를 원하고, 부처님 삼십이상 팔십종호를 매일 뵙기를 원하고, 이것이 안근으로 원을 세우는 거예요. 그러면 바꿔서 그 원이 성취가 되려면 내가 보는 것마다 좋은 것이 되어야 하잖아요. 나는 육근의 원을 다 세웠는데, 안근의 원만 세워도. 제가 중심이 되어, 제 원은 안근이에요. 그런데 우리 불자님 눈이 내 안근이 아니에요. 내 눈에 비치는 경계네요. 색경계예요. 우리 불자님 개개인을 보면, 불자님 눈은 각각 안근이에요. 불자님 눈에 비치는 제 눈은 색경계예요. 제 손은 뭐예요? 저한테는 신근이에요. 마이크도 잡고 컵도 잡고. 그런데 우리 불자님들에게는 신근이 아니에요. 눈으로 보이는 대상일 뿐이에요. 나한테는 신근인데 이 손도 우리 불자님한테는 색경계일 뿐이에요. 이 손이 신근 하나에만 속하는 건 아니지만, 누구를 중심으로 하냐에 따라서 달라지네요. 달라지는데, 사실은 나와 남이 둘이 아니고,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라고 하면서 육근과 경계가 둘이 아니겠냐고. 둘이 아니에요. 그래서 육진삼매(六塵三昧)에 든다고 하는데, 내가 항상 좋은 것만 보려면 내가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잖아요. 우리 불자님 눈에 비치는 내 몸도 좋은 모습이어야 하잖아요. 화를 내고 펄펄 뛰는 모습 보기 싫다고 하면, 그 원을 세우려면 내가 화를 내면 안 되겠죠. 그러니까 내 안근을 청정하게 하고, 내 이근을 청정하게 하고, 내 설근을 청정하게 하고, 내 육근을 청정하게 하는 게 원효스님의 참회기도이고 자비도량참법의 육근의 원을 일으키는 것이기도 해요. 화엄경에 보면 부처님을 신 가까이 모시고, 부처님을 뵙고 부처님 음성을 듣고, 가까이 모시는 선근공덕이 너무너무 많다는 말씀을 설산의 선현약왕수 비유를 했어요. 히말라야산 설산에 약나무가 있는데, 최고라. 어떤 이라도 약나무를 보기만 하면 눈이 청정해지고, 약나무 향기를 맡기만 하면 코가 청정해지고. 약나무 주변의 흙만 취해도 모든 병이 낫고. 이런 약나무가 있단 말이에요. 부처님도 마찬가지다. 부처님을 우리 눈으로 뵙기만 해도, 부처님 상호를 뵙기만 해도 눈이 청정해 지고. 청정해진다는 것은 업장에 묶여 꼼짝 못해서 윤회하는 게 아니고, 틀림없이 해탈하고 자유자재하고 끝없는 행복을 누릴 수가 있고 부처님처럼 된다는 거예요. 부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해도 귀가 청정해지고, 코가 청정해지려면 부처님과 연결시키면 어떻게 해야 되요? 향기를 맡아야 하는데, 부처님의 향기는 어떤 거지요? 화엄경에 보면 계의 향기라고 했어요. 향기가 계향만이 아니고 법신의 향기가 있어요. 원 법신의 향기. 법신인데, 법신의 향기가 잘 안 나온다, 그쵸. 법신의 향기가 계향이 될 수도 있고, 정향도 되고, 혜향도 되고 해탈향도 되고 해탈지견향도 되고. 우리 불자님들도 다른 분에게 비근이 청정하게 해줘야 보살행이잖아요, 바라밀행. 그러려면 어떤 향을 가진 존재가 될까. 향수 뿌리는 거 말고. 향수 뿌리는 것도 잡된 냄새를 없애주니까 대단한 거예요. 그런데 그거는 무상하거든. 법신은 무상하지가 않아요. 법신의 향기가 있다고. 그거를 닦자고 하는 게 수행이에요. 그런데 맛은 뭘 보느냐. 사찰 음식이 맛이 대단한데요. 그런데 부처님에게 맛은 법미라야 하거든요. 음식을 먹지만, 천도재를 지내도 음식을 한껏 차려 놓는데, 영가는 사대가 다 흩어졌다고 했는데, 왜 차려놓나. 그게 법식이라서 그래요. 법의 음식을 먹고 모든 마음의 주림을 다 해갈하고. 그러니까 부처님의 법의 맛을 맛보면 이거예요. 법의 맛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내내 경도 읽고, 큰스님의 깨달으신 법력 속에서 일러주시는 부처님의 세계도 듣고 법문도 자주 듣고 사경도 하고 계속 해야 되겠지요. 그 맛에 빠지면 다른 것은 맛이 없을 거예요. 그런데 부처님의 법의 맛에 깊이 물들지 못하니까 좀 하자고 하면 어렵지요. 어렵고 처음 들어보고 이런 거예요. 두 번째 보면 아는 거예요. 오늘 저를 처음 뵙는데, 혹시 한 번 더 보면 아는 분이고 (웃음). 그래서 경도 법화경도 화엄경도 금강경도 아함경도 전부 부처님의 법리가 고스란히 들어있는데, 그걸 전부 맛봐야 된다는 말이에요. 그 다음, 몸이 청정하려면, 신근이 청정하려면, 예를 들어서 제 손으로 상을 만지니까 매끈하다 튀어 나왔다를 느낄 수 있는데, 따뜻하다 차다를 느끼는데, -우리 보살님 맨날 부처님께 가서 만져서 코가 닳았다 하지 말고-, 부처님의 광명을 가까이 해야 해요. 부처님은 항상 광명을 놓으시는데, 상광, 또 때때로 방광도 하세요. 항상 광명을 놓으시는 부처님이신데 어떤 때 보니까 더 환하게 보일 때도 있어요. 부처님의 방광을 내가 감촉으로 느낄 수 있게 되는 거죠. 부처님은 항상 그대로신데, 어떤 때는 나에게 편안하게 보이는데 어떤 때는 아닌 거 같아. 자기가 어떻게 부처님에게 다가가냐가 다른 거죠. 부처님의 뜻을 청정하게 하려면 항상 부처님을 생각하는 거예요. 항상 부처님 생각하는 게 뭐예요. 염불이에요. 물론 신구의 삼업으로 염불하지만, 염불할 때 몸으로는 절하고, 입으로는 다라니 외우고, 명호 부르고, 마음으로 생각하고, 다 염불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염불이라고 해놓고, 염삼보(念三寶)가 다 염불이야. 삼보를 생각하는 것은 다 염불이지만, 그렇게 염불을 깊게 하면 염불삼매가 청정해지고, 나의 생각이 맑아지고, 마음이 청정해지면 내가 하는 모든 게 청정해져요. 그럴 때 부처님처럼 된다고 해요. 부처님처럼 된다는 것은 순간순간 사라지고 없어지는 행복이 아니라 영원히 행복하다 이 말이에요. 그게 상락, 열반락이에요. 우리는 보통 ‘행복해.’ 하는데, 우리는 안 행복해요. 진짜 행복이 아니에요. 상락, 열반락, 끝까지 행복해야 되요. <수명도 한량없고, 광명도 한량없고, 무량수 무량광의 극락처럼 여기 이 땅이 내가 발 딛고 있는 이곳이, 나와 함께 사는 모든 이들이 다함께 행복해지길> 모든 불자님들이 서원하기를 말씀드리고요. 마지막으로 항상 관세음보살님도 그러셨고, 선지식들도, 특히 여성 선지식들이 발원했던 것이 뭐가 있었냐하면, <내 모습을 보는 이는 다 해탈하여지이다, 내 이름을 듣는 이는 다 해탈하여지이다, 나한테 가까이 와서 나와 함께 하는 이들은 다 해탈하여지이다.> 라고 발원하고 있어요. 그래서 <내 모습을 보는 이나, 내 이름을 듣는 이나 나에게 가까이 오는 이나 내 일을 도와주는 이나 내가 도움을 줬을 때 받는 이들이나 다 함께 행복하고 해탈하여지이다.> 발원하며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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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라니] 3월 17일 천독다라니기도 법문
종범스님 2019-03-17
祈禱 기도 一心至心 일심지심 일심으로 지심으로 懇求精勤 간구정근 간절히 구하여 정성을 그치지 않으면 加被具足 가피구족 가피와 구족을 圓滿成就 원만성취 원만히 성취한다. 오늘 다라니 천독 기도 회향이라고 법문해달라고 해서 왔거든요. 기도가 뭐냐. 기도는 문 여는 거예요. 문을 연다. 금은보화가 방안에 가득 있는데, 그 방에 금은보화가 있는 줄 모르고, 밖에서 가난하게 돌아다니던 사람이, ‘저 안에 가면 금은보화가 가득히 있다.’는 말을 듣고, ‘에이, 있기는 뭐가 있어.’ 안 믿고 안 열면 그대로 그렇게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거고, ‘그래, 저 안에 가면 있어?’ 그 말을 듣고 문을 확 열면 그 안에 보물이 가득하게 들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자기가 보물 속에 살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문을 연 그 노력에 의해서 금은보화가 생겼느냐? 그게 아니죠. 본래부터 있던 거예요. 있는데 그 보물이 있는 줄 모르고 헤매고 다녔을 뿐이에요. 있는 걸 얻은 거지, 없는 걸 만든 게 아니다. 이게 기도예요. ‘다 열면 정말로 공덕이냐’ 이렇게 의심할 수 있거든요. 의심 안하면 정말 이상한 사람이고, 전생에서부터 엄청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많이 속아보면 의심이 많듯이, 좋은 일 많이 안 한 사람일수록 의심이 많아요. 사람한테 많이 시달려 볼수록 사람 안 믿거든요. 한 마디 딱하면 의심 없이 바로 알 때 그거를 ‘선근인연(善根因緣)이 깊다.’라고 해요. 선근이란, 착할 선자, 뿌리 근자인데, ‘착한 종자가 가득히 쌓였다.’ 그거죠, 착한 종자가. 그 말 딱 믿고, 그 믿음으로 끝나지 않고, 바로 딱 들어가는 거예요. 옛날에 어떤 큰 스님이 집안이 가난해서 새우젓을 짊어지고 평생 새우젓 장사를 이 마을 저 마을로 하러 다녔는데, 지나가다가 보니까 누각이 큰 게 하나 있는데, 거기에 사람들도 있고, 저기 가서 잠시 쉴 수밖에 없다고 하고 잠시 쉬는데, 그 누각위에서 무슨 말소리가 들려요. 그 말소리를 듣는 순간에 가슴이 시원한 게, 일생의 고민이 다 풀렸어요. 그래서 새우젓 지게 내던지고, 바로 그 자리에서 스님 된 예가 있거든요. 그 말이 그렇게 큰 변화를 준 거는 그 말을 믿음과 동시에 그 말이 자기 속에 들어와서 자기 문이 열린 거예요. 기도는 문을 여는 거다. 문이란 게 한 번 딱 열면 여는 힘으로 그 안에 있는 보물이 다 생긴 게 아니고, 본래 가득히 있었는데, 지금까지 문이 닫혀서 모르던 것을 문을 여는 그것으로 그냥 지금까지 보지도 듣지도 못한 무진장보배를 만나게 된다 그거예요. 중국에서 국민당 군인들하고 공산당 군인들하고 전쟁이 일어났어요. 국공합작전쟁이라고 하는데, 국민당 군대가 대만으로 갔거든요. 저 시골에서 온 군인들이 많은데 뜨거운 물을 본 일이 없어요. 수도를 틀면 물이 나오거든. 그래서 자기 군대에도 가져다 놓고 수도를 틀어요. 시장에 가서 ‘이 수도꼭지 틀면 물이 나옵니까?’하니까 상인이 나온다고 하지, 않나온다고 해요(웃음). 사다가 부대에 가서 걸어놓고 트니까 안 나와. 다시 가서 ‘왜 물이 안 나오냐?’고 했더니, 엄청나게 질책을 해요. 그런 것이 문화충격이고, 시사 하는 바가 많이 큰데요. 수도 틀면 나오는 건 사실이에요. 그런데 나오도록 물이 다 연결이 되었기 때문에 나오는 거지, 튼다고 나오냔 말이에요. 연결 안 됐으면 안 나오는 거예요. 나오도록 다 연결됐는데, 연결된 수도꼬지를 틀면 바로 나온다, 기도라는 게 바로 그와 같다는 말이에요. 그런 게 기도예요. 있는 거 그대로 맞이하는 게 기도지, 없는 거 만들어내는 게 아니다. 그런데 이걸 의심만 하면, ‘그거 해가지고 되냐.’ 이런 의심만 하게 되요. 이거는 ‘수도꼭지 걸어놓고 튼다고 물이 나오냐’ 이런 거예요. 나오게끔 되어있는 걸 모르는 거예요. 그건 그렇고 기도라는 것이 뭐냐. 기도는 기원한다고, 바랄 기자, 원할 원자 기원이라고 하고, 빌 축자, 원할 원자 축원이라고도 하는데, 이 기도는 기원, 축원보다도 더 의미가 강한 언어예요. 기도한다, 기원한다, 축원한다 중에 기도가 의미가 가장 강한 건데, 그걸 해석해 보면 이런 거예요. 기도라는 것은 일심지심(一心至心)이다. 기도는 일심이다. 기도는 지극할 지자, 마음 심자, 지심이다. 한 마음, 지극한 마음. 지극한 마음은 열을 할 수 있는데 한둘만 하는 게 아니고, 열을 할 수 있다면 열에 근접하게 지극, 극에 이른다는 말이거든요. 극치, 극에 도달했다. 불교에 모든 얘기하는 구조가 일심지심. 일심 한 마음, 두 가지 생각이 있으면 그걸 산란이라고 하는데, 기도는 산란한 게 아니에요. 이 생각 일으켰다 저 생각 일으켰다 하는 건 산란인데, 산란한 건 기도라고 안 해요. 한 마음으로 집중시키는 거예요. 일심이라고 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계속하는 걸 지심이라고 해요. 기도는 일심이고 기도는 지심이다. 그리고 기도는 간절하다는 간자가 있어요. 구할 구자. 간구라고 해요. 간절하게 구하는 거다. ‘뭔 기도하지?’ 그래요. 그런 건 아니에요. ‘뭔 기도하지.’ 아들기도를 할까, 내 기도를 할까, 가족전체 기도를 할까. 이거는 간구가 아니에요. ‘구하면 좋지.’ 이런 거거든요. 원 기도의 기본 의미는 간구예요, 간절히 구하는 거예요. 기도는 일심이다, 기도는 지심이다, 기도는 간구다, 간절하게 구하는 것이 기도다. 또 ‘기도는 정근이다.’라고 해요. 정근이 뭐냐. 정성을 다해서, 정자가 흰쌀 정자인데, 정미라고 할 때 쌀 껍데기가 붙으면 정미라고 안하거든요, 현미라고 하지. 쌀의 알맹이만, 하얀 알맹이만 드러날 때 그걸 정미라고 해요. 정미소라고 하잖아요. 그 정자와 부지런할 근자, 정근. 정이라는 것은 정성이란 뜻이에요. 정성을 다해서 끊임없이 하는 거다. 부지런할 근자는 중단하지 않는다. 하다 안하다 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계속 하는 걸 근이라고 하고, 정성을 다하는 걸 정이라고 하고. 그래서 정성을 다해서 끊임없이 하는 게 그게 정근이다. 별거 아니에요. 하면 되는 거예요. 기도는 한 마음이다, 기도는 지극한 마음이다, 기도라는 것은 간절히 구하는 것이다, 기도라는 것은 정성을 다해서 끊임없이 하는 것이다. 그게 기도예요. 다른 게 없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되냐. 가피가 있고 구족이 있는데, 구족이라는 것은 갖출 구, 만족할 족, 아무 것도 더 이상 구할 것이 없이 대원을 원만 성취한 거, 큰 원을 원만하게 다 성취한 것을 구족이라고 해요. 그래서 기도 성취 중에는 구족성취가 있습니다. 더 이상 구할 것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는 거예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거예요. 그 경지에 도달하는 기도 성취를 구족성취라 그러거든요. 그런데 가피 성취가 있어요. 가피, 뭘 구하던 것이 이루어진 거. 그거는 부분적인 것이지 전체적이고, 또 과정적인 것이지 어떤 최종적인 건 아니거든요. 그래서 기도는 가피성취가 있고, 구족성취가 있다. 기도하면 바로 성불하는 거예요. 기도하여 소원성취, 원하는 바를 이루는 것은 가피성취예요. 그래서 가피와 구족을 원만히 성취하는 것이 그게 기도다. 오늘 법문의 주제가 이런 거예요. 가피도 성취하고 구족도 원만 성취하는 것이 그게 기도인데, 그게 왜 되냐. 기도는 문 여는 거기 때문에, 만드는 게 아니고, 문 여는 것이므로, 조작이 아니고 개문(開門)이다. 열 개자, 문 문자. 내가 만드는 게 아니에요. 개문, 문 여는 거예요. 아주 간단한 거예요. 아주 간단하게, 금은보화가 가득 있는데, 문만 열면 되는데, 근데 왜 문을 못 여냐. 믿지 못해서 못 열고, 믿는다 하더라도 하지 못해서 못 열어요. 믿지 못하고 하지 못해서.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이후로 역사가 2,000년 가까이 됐는데, 이 불교라는 것은 인생의 정신이기 때문에 , 이 정신이라는 것은 전해진다고 다 안착되는 건 아니에요. 전해 받는 쪽에서 말할 때 전래라고 하거든요, 전해 왔다고. 전하는 쪽에서 말할 때는 전수라고 해요, 줄 수자. 전래, 전수. 불교 유통 역사를 볼 때 전래라는 말을 써요, 전해왔다. 인도나 중국에서 자기들 중심으로 말할 때는 한국에 불교를 전수해줬다고 말하죠. 그럼 전한다는 얘기는 불이 있는데, 나무에다가 불을 이렇게 대면 점화와 같은 의미에요. 나무에다 아무리 불을 대도 나무가 안타면 불은 꺼지고 말아요. 점화가 돼서 발화가 됐을 때, 불이 확 일어났을 때, 그 때 불교가 한국에 온 거예요. 그냥 횃불을 가지고 불이 타다가 아무 나무도 타는 나무가 없으면 꺼지고 말죠, 있을 수가 없는 거지요. 우리 정신력의 바탕이 아주 강한 거 같아요. 불교전래사를 가만히 보면 불교에서 엄청난 일을 이룬 것이 문헌에 계속 나타나요. ‘아, 이건 정신토양이 그렇게 깊고 이렇게 광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삼국유사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에 보면 불교에 관계된 게 대부분이에요. 한국고대불교전래사를 이해할 때 삼국유사가 그렇게 중요한 책이거든요. 기도에 대한 영험한 사례가 엄청나게 많아요, 삼국유사에. 거기에 보면 다섯 살 난 아이가 갑자가 실명을 했어요. 지금도 아이가 소중하지만, 예전엔 더 소중했거든요. 아들 하나 잘 낳아서 키우면 보험 들 필요도 없고요. 평생 노후 걱정할 필요도 없고, 집안 걱정할 것도 없고, 집안 노동력 걱정할 필요도 없고. 온 집안을 종합적으로, 총체적으로 책임지는 게 아들이에요. 요즘 애들은, 제 고향이 충청도인데 충청도 말로, 싸가지가 별로 없어요. 싸는 우리말이고, 아지는 한문인데, 강한 말을 쓸 때 대부분 우리말과 한문을 같이 쓰는 말입니다. 왜 싸가지가 없냐. 부모는 별로 생각도 안하고 부모에게 갚을 능력도 없어요. 그래서 요즘 아들은 예전처럼 전체가 보장되는 아들이 아니에요. 나를 보면 알 수 있잖아요. 부모가 나를 낳아서 기르긴 길렀는데, 그 기른 은혜만 먹고 내가 튀어버렸어. 별별 아들이 다 있는데, 신라시대엔 전혀 안 그래요. 삼국유사 여러 번역에 다 나오는 향가인데요. 노랫말을 지어서 아이에게 관세음보살님 앞에서 계속 부르게 했어요. 삼국유사에는 향가가 많거든요. 신라 때 부르는 노래. 盲兒得眼加被 맹아가 눈 뜬 가피(눈 먼 아이가 눈을 얻었다)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서 천수관음 앞에 빌어 살우나이다. 즈믄(천)손 즈믄눈을 가지셨아오니 하나를 내어 하나를 덜어 둘 없는 내오니 하나를랑 주시옵시사, 아아 나에게 주시옵시사” (三國遺事卷3 삼국유사권3, 芬皇寺千手觀音 盲兒得眼분황사천수관음 맹아득안) 이런 노래로 계속 기도를 했대요. 얼마나 간절하고 절실한지 내가 관세음보살이어도 안 주고는 못 배겨요. 천수천안, 우리 옛말에선 즈믄이라고 했어요. 천손을 가지시고 천안을 가지셨으니. 어떤 향가를 보면 이렇게 말한 게 아니라, ‘주지 않으면 재미없다는, 주지 않으면 나빠요.’라는 내용이 들어간 것도 있어요. 우리 민족의 감정인 거 같아. <서방가(西方歌)>라는 향가도 있는데, ‘달아, 서방으로 가시나이까. 서방에 가시면 아미타불님께 말씀해주소서. 그리워하는 님이 여기에 있다고 말씀해주소서. 아, 나를 버린다면 48원이 이루어질까.> 아미타불의 48원은 누구든지 자기를 원하고 극락세계에 가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다 극락세계로 이끌어 주겠다, 이게 원이거든요. 가고자하는 내가 있는데, 나를 버리면 과연 48원이 이루어지겠냐.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원을 이루기위해서라도 꼭 해줘야 된다, 이런 식이에요. 참, 이러니까 이게 우리 인간사 중에 너무 강하게 들이대는 사람은 조심해야 되요. 그게 안 이루어지면 가만히 안 있어요. ʻ천 눈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에 하나도 안 준다면 진짜 나빠요.’인데 다행히 그 말은 없어요.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란 말이 있어요. 그게 오늘날까지 내려와요. 이게 반대로도 나타나요. <가시는 걸음걸음에 깔아드리오리다.> 이건 반대인데요, 반대라도 감정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재미없다고, 보복으로 나타날 수 있는데, 자기가 먹었던 것을 소화해서 한으로 간직하고 그것이 공덕으로 피어나게 하는 이런 인격자가 있긴 있는데, 많지 않아요. 그러니까 물불 안 가리고 들이대는 사람은 우선 조심해라. 차후에 보복당할 가능성이 많다. 이런 얘기하면 안 되는데. 그래서 얼마 있다가 눈을 얻었어요. 눈을 떴어요. 안과, 과학적으로 접근할 일은 아니고. 왜 그러냐. 본래 눈이 있었는데, 기도를 통해 만든 것이 아니고, 가려졌단 말이에요. 그런데 뜬 거예요. 기도라는 게 이런 거예요. 일심, 지심, 간구, 정근. 그러면 이렇게 관세음보살을 의지해 눈을 얻었으니까 가피라고 하거든요. 눈이 가려져 있었는데 떴으니까 더할 가자, 입힐 피자, 더 입혀줬다. 이거거든, 이게 가피성취예요. 기도는 또 이상한 게 있어요. 구하는 것은 별 수 없는 걸 구했는데, 경과가 아주 좋은 게 있어요. 어떤 사람이 시어머니가 꼴보기 싫어서 몰래 ʻ우리 시어머니 빨리 돌아가게 해주세요.’라고 기도를 했는데, 시어머니는 안 죽고, 자기 마음이 확 변해서 시어머니에게 인간적인 깊은 이해를 하게 되고 동정을 하게 되고, 시어머니와 나 사이에 있는 철조망이 다 걷혀서 평화가 이루어졌어요. 자기 자신을 미워하지 않거든요. 그런데 사이가 먼 사람일수록 미워하게 되거든요. 미워하는 철조망이 싹 걷히면 자기 아들처럼, 자기 딸처럼 사랑까지 하게 되요. 또 자기 자신처럼 온갖 걸 다 받아들이게 되요. 자신을 왜 미워하지 않냐하면 자신은 모든 걸 다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럴 수 있지. 너 그럴 수 있어. 너는 어쩔 수 없었어. 괜찮아, 괜찮아.’ 이게 자신에게 향한 감정이거든요. 불교에서 아상, 인상이라는 말이 있는데, 나를 생각하는 거, 아상은 탐욕이라고 해요. 탐욕을 왜 부리느냐. 나 때문에 부리는 거거든. 자기를 위해서는 다 욕심을 내요. 그런데 인상은 뭐로 설명하냐하면, 인상은 분노라고 해요. 나한테 분노하는 게 아니에요. 엄청나게 잘 못 한 거 투성인데, 자기 자신에 대해선 분노하지 않아요. 다른 사람의 잘못을 자기가 분하게 여기고 노엽게 여긴다. 그런데 기도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분노한 감정이 확 가셨으면 평화가 오는 거예요.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아니라 철조망이 있었다면, 아침마다 괴롭지 않았을 것을.’ 그 철조망 때문에 그래요. 그걸 확 걷어내면 되는데, 못 걷어내서, 이게 또 기도의 영험이에요. 처음에 자기중심적으로 목표를 가지고 기도를 했는데, 하다보니까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확 바뀌어서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하는 게 기도의 영험이에요. 이광수의 <꿈>이라는 소설에서 나오는 주제이기도 한데요, 신라시대의 어떤 스님이, 조신이라는 젊은 스님이 있는데, 어떤 여인을 사랑하게 돼서 낙산사 관세음보살 앞에 가서 그냥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했는가 봐요. 근데 어느 순간 하룻저녁에 꿈을 꿨는데, 꿈속에서 뭘 얻었느냐, ‘한평생이 꿈인 것을 이제야 알았노라.’ 인생이 꿈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모든 것이 꿈 깨면 그만인데. 이게 엉뚱한 거예요. 구하기는 여자를 구했는데, 얻은 것은 한평생이 꿈인 걸 알았어요. 소설가, 문학가의 플랜을 쫓아다니면 핵심을 몰라요. 문장에 헤매는 게 소설이거든. 결론은, 구하기는 그 여인과 함께 하기를 구했단 말이에요. 얼마나 간절하게 구했던지, 간구. 꿈을 얻었는데, 그 꿈속에서 무얼 얻었느냐. ‘한평생이 꿈인 줄을 이제야 알았노라.’ 전혀 다르잖아요. 이게 또 기도예요. 그러니까 한평생이 꿈인데, 거기서 뭘 얻고 안 얻고, 전부가 꿈이다 말이죠. 평생이 꿈인데, 얻는 것도 꿈이고, 잃는 것도 꿈이고, 가는 것도 꿈이고, 오는 것도 꿈이고. 오고 가고 얻고 잃을 땐 도저히 몰라요. 영리한 사람은 죽기 30분전에 알아요. 인생이 꿈인 것을. 좀 덜 영리한 사람은 10분전에도 몰라요. 좀더 덜 영리한 사람은 1분전에도 몰라요, 1분전에도. 석가모니가 영리하다는 건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보고 나도 죽는다는 걸 요즘 말로 뼈 때리게 안 거예요. 그냥 어설프게 안 게 아니고. 이게 위대하다는 거예요. 제가 어릴 때, 7살인가 8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걸 봤는데, 나도 죽는다는 걸 꿈에도 몰랐어요. 그때 나도 죽는다는 걸 알았으면 지금보다도 더 순수하게, 더 간절하게 살지 않았을까. 근데 이 기도를 통해서 그 여인이 문제가 아니라 내 일생이 꿈이구나, 이거를 절실히 아니까 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꿈 깨는 일밖에 없거든. 그래서 꿈 깨기 위해서 다른 건 다 그만두고 서방정토 극락세계 염불만 했다. 이런 게 나오거든. 이런 게 기도의 또 영험이에요. 꿈인 줄 알 수 있는 능력이 자기 안에 꽉 있는데, 밖으로만 계속 헤매다 보니까 모르다가 간절하게 구함을 통해서 그 알 수 있는 능력의 문을 연거죠. 이게 기도입니다. 그리고 참회 기도가 있어요. 참회가 어려운 게 자기 집착, 자기밖에 없으니까 이걸 미혹이라고 그러거든요, 자기 미혹. 미혹이라는 게 잘 못 본다는 거거든요. 뭘 잘 못 보냐, 자기를, 자기미혹. 자기는 오래 살 거다, 자기는 건강할거다, 자기는 아는 것이 바를 거다, 이런 자기 미혹이 있고, 이게 한 번에 자극을 받아 무너지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어요. 당황해서, 이걸 공황장애라고 해요. ‘나는 능력이 없네, 나는 가치가 없네.’ 자기가치를 부정하는 것을 우울증이라고 하는데, 우울증이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하면 옛날에 화병인데요. 우리 할머니도 화병이셨는데, 우리 할아버지가 하도 바람을 피워서 화병 났다고. 화병이니 우울증이니 이런 게 뭐냐 하면 자기 가진 걸 모르는 게 우울증이에요. 인간은 자기 가진 걸 몰라요. 이게 밖으로 구하는 마음이 워낙 강하다 보니까 현재 가지고 있는 건 항상 몰라요, 빈털터리에요. 이걸 문학적으로 표현하면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빈 가슴’. 이게 인간이에요. 이게 우울증이에요. 외국말로 하면 노이로제. 노이로제라는 건 우울증인데, 가진 걸 모르는 거예요. 뻔한 거예요. 아, 기가 막혀요. 언젠가 여기 법문하러 왔는데, 참 아름답게 생긴 여인이 세상을 떠났다고, 아가씬데 재를 하더라고. 저 아가씨가 어째 젊은 나이에 갔나 했더니, 무슨 미스코리아에 출현해서 선으로 당선이 됐는데, 진이 못 됐다고 죽었대요. 우리는 미스코리아 진선미 자체를 못 들잖아요. 참가도 못 하잖아. 출전해서 선에 당첨도 못 되는데, 선에 된 사람이 진이 못 됐다고 극단선택을 했다는 거여. 그런 거를 노이로제라고 하고, 그런 거를 우울증이라고 해요. 그게 전부 자기미혹이에요. 그래서 정신이 건강하면 밖으로 구하는 것보다 현재 있는 걸 먼저 느껴야 해요. 할아버지가 바람을 피면 어때, 여기 사는데. 바람피는 할아버지를 볼 게 아니라 지금 나하고 사는 할아버지를 보면 철조망이 걷히잖아요. 보살 마음이 하나 더 일어나면 ‘내 남편이 아직도 능력이 있네.’ 더 가면 ‘바람피는 건 좋은데 건강만 해치지 않게. 저녁에 내 집에 돌아올 힘은 있게 피소.’ 이 정도까지 갈 수 있는 거예요. 우리 마음속에 있는 강력하고 힘센 힘이 못 나와서 이렇게 되는 거예요. 부정적인 것만 많이 받아들이고 현재 자기에게 있는 건 하나도 모르고 있는 걸 모르는 게 그게 노이로제고 우울증이다. 스트레스란 뭐냐. 계속 더 입으려고만 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80인데 대중 앞에만 나가면 떨린다고 하더라고요. 왜 떨리냐. 더 잘 보일려고. 이유는 모르고 자꾸 더 입으려고 하는 게 스트레스예요. 가진 걸 모르는게 노이로제고. 근데 기도를 하면 노이로제나 스트레스가 확 풀려서 절대 평화를 얻을 수 있다, 이런 것이 구족성취에요. 절대평화. 이건 다 만드는 게 아니고, 본래 있는 건데, 그냥 문 열어서 쓸 뿐이다. 뭐 이런 거예요. 천수경에 보면 천수다라니가 어떤 거냐. 慈光照處蓮花出이요 자광조처연화출 자비광명 비춘 곳에 극락세계 나타나고 慧眼觀時地獄空이라 혜안관시지옥공 혜안으로 바라볼 때 지옥은 없다. 又況大悲神呪力 우황대비신주력 그뿐인가, 대비신주력은 衆生成佛刹那中 중생성불찰나중 중생이 찰나에 성불한다. (神呪着語 신주착어) 자광조처연화출이요, 제사 지낼 때 항상 하는 말이거든요. 연화는 극락세계를 말하는데, 극락세계가 어디서 나오냐. 자기자신에서 나온다. 자기광명이 비추는 곳에, 자광조처에 연화출이라, 극락세계가 출현한다. 내 마음이 자기심으로 충만하면 가는 데마다 극락세계인 거예요. 자광조처연화출이라, 자기광명 비추는 곳에 극락세계가 나타나고, 출자는 나타날 현(現)자와 같은 뜻이고, 출현한다고 하죠. 혜안관시지옥공이라, 지혜의 눈으로 볼 때 지옥은 없다. 지옥은 전부 어리석은 마음에서 나타난 거다. 지혜의 눈으로 볼 때 지옥은 없다. 이게 불교거든요. 又況, 우황, 그뿐이겠나, 또 우자, 하물며 황자, 大悲神呪力 대비신주력, 대자대비관세음보살님의 다라니 주문은 衆生成佛刹那中 중생성불찰나중, 중생성불이 찰나에 이루어진다. 중생이 찰나에 성불한다. 성불이라는 것이 자기의 근원을 완전하게 깨달아서 완전한 평화, 완전한 행복을 이루는 것을 성불이라고 하는데, 완전평화, 완전성불이 찰나에 이루어지는 것이 다라니의 위신력이다. 이런 거를 계속해요. 그런데 한자가 되어 잘 이해가 안 되는 장벽이 있고, 그런 말을 듣는다 해도 지금까지 계속 자기미혹, 이런 것에 빠져있어서, 잘 믿을 수가 없고, 믿어도 또 순간뿐이고, 오래 가지 않아서 그런 건데, 잠시 믿고 잠시만 했다 해도 거기에는 엄청난 인연이 쌓여있어요. 그래서 이런 걸 가피 중에 명훈가피력(冥熏加被力)이라고 해요. 어두울 명, 연기 쏘일 훈. 어둡다라는 건 자기도 모르게 연기를 옷에 쏘이면 서서히 연기 냄새가 몸에 배듯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몸에 가득해지는 것을 명훈, 명훈가피라고 해요. 아까처럼 꿈에 나타난 것은 현몽가피라고 하고. 신라시대 의상스님의 그 유명한 제자중의 하나가 지통(智通)제자인데, 지혜 지자, 통할 통자, 이 지통이 태백산 조그만 절에서 화엄경 공부를 하는데, 한 번은 그 절 앞으로 멧돼지가 지나가요. 그걸 보고 법당에 모셔진 부처님한테 열심히 기도하는데, 그 부처님이 말을 하는 거예요. 이런 걸 현신(現身)가피라고 하는 거예요. 나타날 현자, 몸 신자. 뭔 말을 하느냐. ‘저 앞에 지나간 멧돼지는 너의 전생이고, 지금 너는 너의 금생이고, 나(부처님 존상)는 너의 내생이다.’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서 ‘아, 삼세가 일찰나다.’라는 걸 깨달은 거예요. 삼세일념(三世一念), 생각 염자를 생각이라는 뜻도 되고, 찰나를 번역할 때 생각 염자로 번역을 해요. 일찰나를 일념이다라고.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은 일찰나가 무량겁이란 얘기에요. ‘어, 이게 삼세가 일찰나네. 과거현재미래가 일찰나에 다 있네.’ 이거를 깨닫고, 의상스님께 말씀드려서, 의상스님으로부터 법성게 글과 인(도장)을 받아서 계속 정진하여 지통이라고 의상스님의 십대제자 중에 하나인 아주 유명한 제자가 됐거든요. 내가 간구하게 되면 불가사이하게 저기 모셔졌던 부처님이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또 꿈에 나타나고. 또 가피를 얻어서 잃었던 문을 다시 얻고, 이런게 원리는 똑같은 거예요. 만드는 게 아니라 문 열어서 얻는 거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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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3월 7일 신중기도 법문
주지스님 2019-03-07
오늘이 몇 월이지요? (2월) 2월은 바람달(영등달)이라고 해서 ‘영등할매’가 예쁜 옷을 입혀서 딸을 데리고 오면 다홍치마를 휘날리게 하느라고 바람이 불어 흉년이 들고, 분홍치마에 옥색저고리를 입혀 며느리를 데리고 오면 며느리가 미워서 다홍치마를 얼룩지게 하느라고 비가 내려 풍년이 든다고 해요. 심술궂다고 하는데, 다 옛말들이에요. 2월 초하루는 바람달이어서 조심해야 한다고 하고, 경상도 운문사에서는 2월 초하룻날 마을에 내려가 쑥떡을 탁발해 옵니다. 요즘은 그런 풍속은 없어졌죠?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쑥떡을 먹고 1년 무탈하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저희도 이따 쑥떡을 드릴 거예요. 올 해 삼재가 뭐죠? 뱀띠, 닭띠, 소띠. 그런데 그 세 띠만 해당하는 게 아니에요. 사주에 사유축이 있으면 그대로 삼재예요. 그러니까 모두 조심하라는 의미예요. 그렇다고 거기에 집착하여 이상한 집에 기웃거려 부적을 만들거나 하면 안 돼요. 우리는 좋은 부적 있죠! 신묘장구대다라니. 최고의 다라니입니다. 대비주는 관세음보살대비주입니다. 천독기도, 천일기도 회향하고 옴마니 반메훔 족자 받아가셨죠. 공양도 제 때 제 시간에 맞춰서 받으셔야합니다. 다 나눠주시면 됩니다. 보시하면 됩니다. 여러분들도 집안이 무슨 일이 있으면, 꽃공양, 떡공양하고, 그게 다 공양의 근원입니다. 제가 언젠가 공양에 대해 이야기할 때 말씀드렸죠. 참회할 때는 해탈향, 만행은 꽃공양, 마음이 불안하면 감로다, 차공양을 하면 됩니다. 등은 반야등, 그리고 보리과는 과일입니다. 선열미이므로 찹쌀을 올려도 좋고, 팥을 올려도 좋습니다. 관세음보살님께는 팥을 올리면 좋고, 액땜을 하고 싶다면 찹쌀밥을 지어 대중공양을 올리시면 좋습니다. 4월 초하루는 부처님 오신 날이 있으니 더 좋아요. 2월도 8일 출가재일, 15일 열반재일이 있으니 그에 맞춰 천독다라니기도를 올리잖아요. 그만큼 도량이 맑다는 의미입니다. 한명 하는 것 보다, 10명 하면 더 기운이 세지고, 20명이 하면 더 세집니다. 도량청정무하예(道場淸淨無瑕穢) 삼보천룡강차지(三寶天龍降此地)라고 하잖아요. 다른 절에서들 성지순례 오시면 어떻게 이렇게 절이 깨끗하냐고 합니다. 보세요, 깨끗하잖아요. 우리 신도들의 기운이 맑아 깨끗한 마음을 일으키니까 도량이 청정한 거예요. 그러면 삼보천룡이 다 오시는 거예요. 도량이 더러우면 삼보청룡도 안 오세요. 나쁜 생각 가지고 절에 안 오시잖아요. 첫 발 내디디면 천릿길을 간다고 하듯이, 좋은 생각 내시면 만사가 형통입니다. 또 사경을 하면 재앙이 소멸됩니다. 인등은 지혜입니다. 초는 백년해로입니다, 수명장수와 지혜도 되고. 미역과 칼국수는 자손번창입니다. 우리가 공덕을 몰라서 안 짓는 건 아니잖아요. 여력이 안 되면 못 지어요. 그렇지만 물질적인 공덕만 공덕이 아닙니다. 남을 기쁘게 해주는 것도 보시입니다. 화안, 얼굴을 환하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집니다. 찡그리면 주변사람들도 불편하게 됩니다. 좋은 마음, 밝은 생각 내면, 기운이 다 좋아집니다. 출가재일이 되면 우리 스님들은 삭발한 머리를 한번 만져봅니다. 내가 왜 삭발을 했나. 밥을 못 먹어서 온 것도 아니고, 뭐가 부족해서 온 것도 아니고, 도를 닦기 위해서 왔거든요. 단료형고(但療形枯) 위성도업(爲成道業)이라고 해요. 그래서 음식을 먹는 것도 형태의 마름을 고치기 위해서 먹는 거지, 맛을 탐해서 먹는 건 아니에요. 우리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드는 음식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수행식이라고 해요. 자연식이고요, 이 음식을 먹으면 건강하기 때문에 건강식이라고 해요. 여러분도 맑게 먹고 맑게 살면 모든 것이 맑아집니다. 우리가 3월1일은 뭐 했죠? 삼일절 행사했죠? 문재인대통령이 어디 태극기를 들고 나오셨는지 아세요? 진관사태극기였습니다. 진관사는 독립운동의 거점사찰입니다. 불교신문에 기사에 보니까 이런 내용이 있어 들고 나왔습니다. 독립운동과 깊은 인연을 지닌 사찰은 템플스테이로 의미를 살려 좋은 반응을 얻었다. 불교계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초월스님의 태극기를 보관 중인 서울 진관사, 백범 김구 선생이 한 때 출가했던 공주 마곡사, 평창 만세 시위를 주도했던 월정사, 경북 영해 만세운동을 주도한 장육사 등이 템플스테이로 3·1 운동 정신을 되새겼다. 용성스님은 범어사에서 열심히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한용운스님과 백용성스님이 옥살이를 하셨을 때, 백초월스님이 군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도왔습니다. 15세에 영원사에서 출가하셨습니다. 함양군, 고성군, 은평구, 진관사와 MOU체결을 하여 같이 가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백초월스님을 기려야 하겠습니다. 백초월스님께서는 1944년 6월 29일 청주교도소에서 옥사하셨습니다. 그 스님을 기려 우리는 6월달에 추모제를 합니다. 올 해는 100주년 행사입니다, 같이 기도합시다. 우리는 항상 기도로서 일관해야 합니다. 바른 견해(정견)로 마음을 비우고 있는 그대로 정진하자 -위부 노화엄스님-佛法在日用處 (불법재일용처) 불법은 일상생활 속에 있으며 (부처님은 법계에 안 계신 곳이 없습니다.) 行住坐臥處 (행주좌와처) 가고, 머물고, 눕는데 있으며喫茶喫飯處 (끽다끽반처)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데 있으며語言相問處 (어언상문처) 말을 서로 주고받는데 있으며(말을 상스럽게 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구업을 지으면 안 됩니다. 진어, 항상 진실한 말만 해야 합니다. 금강경에 부처님은 진어자 여어자 실어자 불망어자라 하셨는데, 중생은 항상 구업만 짓습니다. 그러니까 절대로 남의 흉을 봐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공덕이 안 되는 거예요. 장점만 보는 것도 보시입니다. 눈의 보시에요. 좋은 말만 하는 것도 입의 보시예요. rfo서 우리는 항상 좋은 말,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所作所爲處 (소작소위처) 짓고 움직이는데 있다. 수행은 일상사입니다. 특별한 것 없습니다. 그래서 평상심이 그대로 도라고 했습니다. 불법은 일상생활이에요. 사람이 살아가는 일 그 자체예요. 사람이 하는 일상사를 두고 달리 불법이란 있을 수 없어요. 일상사를 버리고 따로 불법을 찾는다면, 그는 영원히 찾지 못합니다. 일상사를 버리고 불법을 찾는 것은 물결을 버리고 물을 찾는 일이며, 금그릇을 버리고 따로 금을 찾는 일이에요. ‘금강경’에 “일체법이 모두 불법이다(一切法皆是佛法)”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일이 불법이에요. 항상 다른 사람을 칭찬하고 자기가 남에게 이를 주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항상 좋은 일만 하셔야 되요. 그래서 우리가 불기를 닦는다든지, 향로를 닦는다든지 촛대를 닦는 것도 다 공덕을 짓는 일입니다. 마지 올리는 것도 그렇고, 화장실 청소하는 것도 그렇고, 공양간에서 그릇하나 씻는 것도 공덕입니다. 불법이고. 春在枝頭已十分(춘재지두이십분) 봄은 이미 매화가지 위에 한껏 와 있었네 봄(見보다) 비구니 스님의 偈頌盡日尋春不見春(진일심춘불견춘)이요 하루 종일 봄을 찾아도 못 찾았네.芒鞋遍踏壟頭雲(망혜답파롱두운)로다 짚신이 다 닳도록 온 산을 다 헤매였네. (봄은 느끼는 거예요.)歸來偶過梅花下(귀래우과매화하)니 집으로 돌아오다 매화밑을 지났는데春在枝頭已十分(춘재지두이십분)이로다. 봄은 이미 매화가지위에 한껏 와 있었네. 미래는 준비하는 자의 몫이고, 행복은 음미하는 자의 몫이고, 가피는 느끼는 자의 몫이에요. 미래와 행복과 가피는 다 자기 몫이에요. 남이 해주는 건 없어요. 그래서 행복도 항상 느껴야지, 부처님의 가피도 항상 느껴야지 남이 대신하는 건 아니에요. 공부도 자기가 스스로 해야 돼요. 기도도 할 때 스님이 해주겠지 하지만, 뭘 해줘요. 내가 해야 합니다. 도량도 중요하고, 스님도 중요하고, 본인도 중요합니다. 정법한 곳을 다녀야합니다. 이상한 곳을 다니면 돈만 없어지지 되는 일이 없어요. 이상한 곳에 다니며 묻지 말고 기도 열심히 하세요. 하기 힘들면 <옴>이라도 하세요. 항상 기도하는 자세로 본인이 하셔야 합니다. 당신은 부처님 이십니다.당신은 부처님 이십니다.당신은 부처님 이십니다.우리 불자들도 부처님의 삶을 본받아, 우리도 부처님같이,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여 정진해 나가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부처님답게 생활하고, 부처님과 같이 말씀하고, 부처님같이 정진하고, 부처님같이 부처님 되면 그대로 부처님이에요. 다같이 부처님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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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법회] 3월 3일 일요법회 법문
덕현스님 2019-03-03
오늘은, 독립운동 100주년을 기리는 행사가 있는 날입니다.진관사는 독립운동유적지로서 이곳에서 발견되었던 태극기를 관람하기 위해 오늘 다함께 한옥박물관에 가서 관람을 하고 돌아올 예정입니다.일본으로부터 나라를 되찾으려고 노력했던 선조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이 자리에서 편안하게 앉아서 법회를 할 수 없었을 거예요.그 당시를 생각하면서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그리고 또 하나, 독립, 해탈, 부처님께서 이미 말씀하셨죠, 니르바나. 내 안의, 내 자신, 자진해서 스스로의 독립이 되고 해탈을 이룬다면 자유자재하게 삶을 누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그렇게 나 하나만으로도 자유, 해방을 느끼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나라를 잃은 우리 민족들은 얼마나 더 절절했을까 싶습니다.우리는 그러한 선조들의 노력을 감사히 생각하면서 오늘 독립운동 100주년을 기리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